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,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.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장미의 이름 (문단 편집) === 프롤로그 === 노년의 아드소는 멜크 수도원의 독방에서 수기를 쓰며 사건이 일어난 당대의 시대상을 설명한다.[* 아드소의 이야기를 제외하면 실제 역사 그대로인지라 [[아비뇽 유수]]나 [[루트비히 4세#s-2]] 등의 관련 항목을 참조하면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된다.] 14세기 초에 [[교황]] 클레멘스 5세가 [[아비뇽 유수|교황청을 로마에서 아비뇽으로 옮긴]] 이후, 지역 군주들은 [[로마]]를 차지하기 위해 다투게 되었고, 로마는 혼란의 도가니가 된다. 그러던 1314년, [[프랑크푸르트]]에서 [[독일]] [[선제후]] 5명이 [[바이에른]] [[공작(작위)|공작]] [[루트비히 4세(신성 로마 제국)|루트비히 4세]]를 [[독일왕]]으로 선출하나, 그와 비슷한 시기에 선제후 2명은 [[합스부르크 가문]]의 미남왕 프리드리히[* [[독일왕]] [[알브레히트 1세]]의 차남으로, 루트비히 4세와는 사촌지간이었다.]를 대립 독일왕으로 선출한다. 1316년, [[아비뇽]]에선 [[교황]] [[요한 22세]]가 선출된다. 1322년, 루트비히는 정적인 프리드리히를 사로잡아 거세시켜버린다. 그가 확고한 황권을 잡자, 그를 경계한 요한 22세는 그를 파문시켜버린다. 황제도 이에 맞서 교황을 배교자라 비난한다. 그 해에 [[프란치스코 수도회]]의 체세나의 미켈레는 그리스도의 청빈 논쟁에 대해 수도회 내 엄격주의자들의 의견을 수용해 그리스도와 사도들은 물건을 소유하지 않았고, 그저 사용권만 가지고 있었노라고 선언한다. 이는 세속권을 강화하던 교황의 심기를 건드리는 발언이었던지라, 1323년, 교황은 회칙 『몇몇 사람들 때문에,,Cum inter nonnullos,,』[* 교황의 회칙 제목은 회칙 본문의 처음 두세 단어로 정하기 때문에 이름이 이렇게 된 것이다.]를 선언해 프란치스코회의 몇몇 신학자들을 이단으로 몰아버린다. 루트비히 황제는 교황과 대립하는 프란치스코회를 자신의 동맹으로 보고, 그들을 지원하기 시작한다. 그리고 1327년에 루트비히는 [[밀라노]]로 내려와 대관식을 진행한다. 당시 아드소는 [[베네딕토 수도회]] 소속으로 멜크 수도원에 기거하던 젊은 수사였다. 그의 아버지는 루트비히 황제의 직신이었던지라, 아들에게 황제의 대관식도 보게 할 요량으로 아드소를 데리고 이탈리아를 돌아다녔다. 그러나 피사가 포위되고, 아버지는 피사의 전투에 집중하느라 아드소를 관리할 수 없게 되었다. 그동안 아드소는 [[토스카나]]의 여러 도시를 방랑하는데, 그게 마땅찮았던 아버지는 아드소를 프란치스코회의 박식한 수사, 바스커빌 출신의 윌리엄의 필사 서기 겸 시자로 보내버린다. 아드소는 윌리엄의 풍모와 지혜에 감명을 받고, 그와 함께 사건이 터진 수도원을 향해 길을 떠나게 된다.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-BY-NC-SA 2.0 KR으로 배포하고,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.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.캡챠저장미리보기